박상우 고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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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이 소멸되는 풍경

레무리안2022-11-23

오랜만에 양양 조산리에 다녀왔습니다. 코로나로 인한 긴 단절을 끝내고 그곳으로 갈 때는 이전 시점의 기억으로 기대가 한껏 부풀었는데 막상 현장에 당도하여 느낀 첫 소감은 너무 충격적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빛을 잃고 판이해진 풍광 앞에서 이제 이곳과의 인연이 완전히 끝이 났구나, 하는 걸 절감하고 돌아올 때까지, 돌아온 뒤에도 긴긴 인연의 속절없는 소멸을 아프게 되새겨야 했습니다. 하지만 인생 만사가 다 이와 같은 생성과 소멸, 만남과 이별이니 이것을 갈무리하고 저작하여 또다른 출발의 발판으로 삼아야겠습니다. 회자...

내 마음의 미확인비행물체

레무리안2022-11-10

월요일 오전에 우연히 휴대폰 갤러리를 열었더니 언제 찍은 것인지 기억나지 않는 이런 사진이 저장돼 있었습니다. 촬영일시를 보니 2022년 11월 5일 오후 11시 28분. 강의를 하고, 작가들과의 약속이 있었던 그날, 언제 어디서 저런 사진을 찍은 것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습니다. 11시 28분이면 만남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인데 마치 내가 찍은 게 아니고 피사체 스스로 찍히게 만든 장면처럼 보였습니다. 신기한 것은 사진에 찍힌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인데 보는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신기한 물체, 미확인 물체라고 했는데 ...

막걸리 유발 시인 김주대

레무리안2022-11-03

지난 9월 20일, 익선동에서 김주대 시인을 처음 만났습니다. 모두 일곱 명이 모인 자리에서 서로서로 자신의 책을 주고받았습니다. 저는 유월에 출간한 에세이집 『검색어 : 삶의 의미』를 건네고 김주대 시인은 자신의 이야기 서화집 『포옹』을 제게 주었습니다. 직관적으로 만나야 할 인연을 만난 듯한 느낌을 그 자리에서 받았는데 집으로 돌아와 그의 이야기 서화집을 읽고 그림을 감상하며 아, 이 책은 빨리 읽으면 안되겠구나, 하는 직감에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근 한 달에 걸쳐 여러 차례 나누어 읽었는데 기이하게도 ...

체증의 문제

레무리안2022-11-03

마음이 울적해서 화요일 오후에 혼자 송추계곡으로 갔습니다. 오후 서너 시경, 햇볕이 한창 좋을 때였는데 평상시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람이 없었습니다. 지난주 후반부터 시작된 체증이 일요일이 되면서 더욱 심해져 음식을 전폐하고 단식 수준으로 버티고 있었는데 천천히 산길을 오르면서 관망하자니 가을은 깊을 대로 깊어져 만산홍엽이 되어 있었습니다. 위에 돌덩어리가 막혀 있는 느낌, 그것이 육체적인 것인지 정신적인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워 오르고 내리는 와중에도 단풍이 단풍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막힌 체증...

2022-10-29

레무리안2022-11-01

루쉰, 진정한 인생의 초상

레무리안2022-10-28

십여 년 전쯤, 어떤 잡지로부터 <나의 여행 앨범> 청탁을 받고 사진 한 장과 원고를 첨부해 보냈습니다. 본인이 실린 기사나 잡지를 한 점도 모아두지 않고 모두 버리는 성정이고 심지어 책을 출간하고 나면 그것까지 눈에 안 띄게 모두 처리하는지라 <나의 여행 앨범>이 실린 잡지도 버리려다가 문득 그 사진을 중국에서 찍어준 중앙일보 손민호 기자와 그 원고를 쓰던 당시의 심정이 태클을 걸어 그 페이지만 찢어 작업실 벽에 붙여 두고 지냈습니다. 원고에 기록한 나의 심정을 잊지 않고 살겠다는 심정이었을 터인데 십년...

결혼식 후감

레무리안2022-10-17

일요일, 참으로 오랜만에 친척의 결혼식에 참석했습니다. 결혼식장에 간 게 사오 년 전의 일인 듯한데 코로나 이전의 일들이라 기억이 아슴푸레하였습니다. 결혼을 기피하는 사회풍조까지 곁들여져 오랜만에 참석한 결혼식장에서 많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객들은 내용을 이미 다 알고 있는 연극에 동참한 표정으로 인생의 새로운 관문으로 들어서는 신랑신부를 축하했고 친척들은 세상 떠난 분들에 대한 얘기, 결혼하고 아이를 낳은 집안 이야기를 주고받았습니다. 가족 생성을 기피하는 시대의 결혼은 정말 용기 있는 선...

남은 인생, 약속을 위하여

레무리안2022-10-05

『검색어 : 삶의 의미』에 대한 리뷰가 실린 멋진 잡지를 받았습니다. 글을 쓰신 분이 25꼭지의 책 내용 중 약속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한 꼭지에서 느낀 게 많은 듯합니다. 책을 읽은 사람마다 가장 인상 깊었다고 말하는 꼭지가 다른 걸 보면 세상을 살아온 경험이 독서에 중요한 영향을 미침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관상을 다룬 부분, 즉 운명에 대해 언급한 꼭지를 가장 인상 깊게 읽었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사랑의 본질에 관해 언급한 부분을 가장 인상 깊게 읽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느날 어떤 독자로부터 의...

알려지지 않은 골목의 매력

레무리안2022-10-02

매주 토요일은 정규 강의가 있는 날이지만 3개월마다 한 번씩 찾아오는 강의가 없는 주말이라 시월 첫날, 모처럼 점심약속을 잡고 시내로 나갔습니다.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시며 보낸 두 시간 정도 서울이라 믿어지지 않는 한적한 곳에 마음 편히 머물며 주말 인파의 스트레스로부터 홀연하게 벗어나 있어서였는지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힐링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숨겨두고 싶은 골목, 알려지지 않기를 바라는 골목. 하지만 인터넷 세상에 그런 곳은 존재할 수 없으니 여기가 어디인지 제가 말하지 않아도 다 알 것이라 믿습니다. 지금까...

추석 대목, 일산 5일장

레무리안2022-09-08

9월 8일 오후, 전날부터 쫓기던 두 건의 작업을 끝내고 5일장이 서는 일산 재래시장으로 힐링하러 갔습니다. 일산 5일장은 3일과 8일에 열리는데 마침 추석 직전의 대목이라 예상 외로 사람이 많이 몰려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던 시기엔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는데 언제 그런 시절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시장은 활기를 띠고 있었습니다. 명절 밑이라서인지 전을 파는 가게에 가장 손님이 많았고 각종 해산물과 육류점 앞에도 사람이 많이 몰려 있었습니다. 일산 재래시장 주변에는 작은 차이나 타운이 형성돼 ...

용유도 할리스

레무리안2022-09-04

팔월의 마지막 날, 아침 운동을 끝내고 샤워를 하는 도중 갑자기 용유도의 할리스가 뇌리에 스팟되었습니다. 부랴부랴 노트북과 그날 읽어야 할 책들을 백팩에 담고 길을 나섰습니다. 용유도로 가는 길은 내비게이션이 없던 시절 온전히 육감에 의존해 만들어둔 저만의 루트가 있는데 이상하게도 그 길은 현재 어떤 경로로 확인해봐도 내비게이션에 뜨지 않습니다. 그 길을 이용하면 일산에서 출발해 평균 40분 경과 후 눈앞에 펼쳐진 시원스런 바다 풍경을 마주하게 됩니다. 내비게이션의 안내를 따라가게 되면 인천공항 주변길을 돌고돌...

마지막 관문을 향하여

레무리안2022-08-30

지난 20년 동안 소설창작보다 무지한 분야에 대한 공부에 매진하기 위해 이리저리 청탁을 사양하고 원하는 분야를 파고들어 인간과 인생의 본질에 대해 적어도 제가 알고자 하는 한 대부분 무지의 영역을 빛의 영역으로 바꾸었습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그것이 곧 무지가 앎의 영역으로 바뀔 때 일어나는 영적 경험입니다. 하지만 딱 한 분야, 주역에 대해서만은 섣불리 파고들지 못한 채 여러 해 동안 책들을 준비해 두고도 눈치만 보고 있었습니다. 공자도 가죽끈이 세 번이나 닳아 끊어지도록 공부했다는 주역, 그러나 아...

신선차 산신냥

레무리안2022-08-23

오늘 새벽에는 비가 내려 산으로 갈까 말까 잠시 망설여야 했습니다. 산행 중에 폭우를 맞은 경험이 몇 번 있었는데 막상 다 젖고 나면 기분이 후련해지던 기억이 되살아나 산으로 갔습니다. 올라가는 동안에는 안개가 많이 끼어 있었는데 운동을 하고 내려갈 때쯤엔 안개가 걷히고 정상 부근의 엄청 큰 바위 상단, 항상 물이 고여 있는 인근에 산신령 포스의 산냥이가 고즈넉한 자세로 앉아 있었습니다. 저 고여 있는 물을 저는 오래전부터 '신선차'라 부르고 이 산의 몇 마리 산냥이 중 저 녀석에게는 '산신냥'이라는 ...

문학평론가 홍정선 교수 별세

레무리안2022-08-22

8월 21일 문학평론가 홍정선 선생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69세의 이른 나이에 안타깝게 지병으로 삶을 마감했습니다. 중국에 대해 중국사람보다 더 많이 알고 한국과 중국의 문학적 교류를 위해 혼신을 다해 열정을 바친 사람. 한중작가회의를 10년 넘게 진행하면서 홍정선 선생과 친하게도 지내고 티격태격 의견 다툼도 많았지만 떠나고 보니 그가 차지했던 자리가 유난스레 커 보입니다. 홍정선 선생의 제자인 길림대학교 외국어학부 부학장인 권혁률 선생과 어제 대화를 나누며 그의 족적에 대해 되새겨보았습니다. 저의 사진첩에도 그...

가을을 줍다

레무리안2022-08-18

병원에 입원하고 퇴원하는 과정을 거치며 근 열흘 넘게 운동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운동을 시작할 요량으로 오늘은 새벽 일찍 파주 심학산으로 갔습니다. 지난 비로 등산로가 많이 패어 있었는데 놀랍게도 도토리들이 익은 것, 안 익은 것 뒤섞인 채 도처에 떨어져 가을이 온 듯도 하고 아직 오지 않은 듯도 했습니다. 그래서 주변에 떨어진 도토리들을 주워 사진을 한 방 찍어주고 다시 정상으로 오르는 동안 문득 잊고 있던 옥잠화가 생각났습니다. 정상 부근에 심어진 옥잠화 군락지는 한여름에 흰 꽃을 피우는데 그 자태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