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이 답답하게 느껴질 떄

레무리안2019-06-05

살다보면 일상이 답답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아프리카는 열린 시공간의 상징처럼 우리를 유혹합니다. 제가 20대 때, 태릉의 육군사관학교에서 군대생활을 할 때 저는 군복에 갇힌 현실이 답답하게 느껴질 때마다 그룹 toto의 AFRICA를 듣곤 했습니다. 광활하게 열린 아프리카 초원에 두 팔 벌리고 서서 마냥 내리는 비를 맞고 싶다는 열망으로 상상력을 부풀리곤 했습니다. 오래된 곡이긴 하지만 세월의 간극이 느껴지지 않는 이 노래, 뮤비도 귀요미처럼 만들어진 AFRICA를 수요일 오전에 투척합니다. 저는 20여 일 정도의...

오늘은 내가 쏜다

레무리안2019-05-31

후배 소설가 중 하나에게 좋은 일이 생겨 그가 '오늘은 내가 쏜다'를 선언하고 모처럼 '삼김일박'의 모임을 가졌습니다. 눈이 내려 쌓이듯 자연스럽게 형성된 소설가들의 모임인데 다 모이면 '사김일박'이 됩니다. 횟집과 재즈바를 거치며 많은 술을 마시고 참으로 오랜만에 순수한 소설가적 관심을 풀어냈는데 그 막바지 고비에서 맞닥뜨린 화두는 모두에게 공분모로 남았습니다. 샤카무니와 우파니샤드를 거쳐 21세기의 과학을 관류하면서도 끝끝내 풀어내지 못한 단 하나의 화두! 인간은 무엇인가.

비로부터의 전언

레무리안2019-05-29

가장 최근에 내린 두 번의 비. 한 번은 카페의 테라스에 앉아 단지 관망만 하던 심야의 폭우, 다른 한 번은 비가 내리는 먼 길을 달려 깊은 산중의 식당에서 망연하게 내다보던 백주의 폭우. 중요한 것은 그토록 억수같은 비의 입자들로부터 아무런 전언도 얻어내지 못했다는 것. 바로 그 무언의 전언, 그보다 더한 넉넉함이 없을 듯하여 단지 두 컷으로 함축한 무언의 전언을 전함.

2차원으로부터의 귀환

레무리안2019-05-16

3월 3일부터 전 3권 분량의 장편소설 작업을 시작해 5월 14일 오후에 1권의 초고를 마무리하였습니다. 6월 6일부터 2권 작업을 시작할 계획으로 20여 일 정도 휴식과 재충전의 시간을 갖기로 했습니다. 강도 높게 작업을 진행하는 동안 내 자신은 2차원적 트랜스 상태에 빠져 강렬한 전자합성파로 존재한 느낌입니다. 길지 않지만 강도 높은 휴식과 여행을 통해 3차원 현실과 일상에 염증을 느끼고 다시 전자합성파 의식 상태로 귀환해야겠습니다. 차원을 오가는 창작 놀이, 힘들긴 하지만 이래서 매력적입니다. (위 사진은 2차원 평면계...

남쪽으로 달려라

레무리안2019-03-29

한 달 정도 장편 집필에 몰두하다가 전체 분량의 1/10 정도를 소화했다고 판단한 날, 돌연 차를 몰고 남쪽으로 달렸습니다. 남쪽 어딘가에서 봄이 녹아 내리는 듯한 기분이 들어 남쪽으로 남쪽으로 쉬지 않고 내리 달려 남해에 당도하여 잠잠한 바다와 마주하며 일박하였습니다. 펜션에서 내다보이는 저 바다를 바라보며 소주를 마시고 다음날은 마음이 내키는 대로 하동 쪽으로 차를 돌려 섬진강변의 벚꽃 터널을 질주해 화개장터에 당도하였습니다. 벚꽃축제가 아직 시작되기 전인데도 사람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벚꽃은 만개해 눈이 부...

따뜻함에 대하여

레무리안2019-03-21

삼십 분 정도 시간의 여유가 있을 때 완전히 마음 비운 상태로 산책을 하다가 저 따뜻할 '溫'자를 만났습니다. 저것이 매달린 공간과 주변 상황,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저의 오감이 한순간 케미를 일으켜 따뜻함의 의미가 우주적으로 부풀어올랐습니다. 따뜻함이란 게 과연 무엇일까. 추울 때 본능적으로 갈망하게 되는 생물학적 온기 이외 따뜻함의 의미에는 광범위한 인간적 교류가 내재돼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이 있을 거라는 믿음, 그런 것을 만나고 싶다는 갈망, 그런 상태로 머물고 싶다는 욕망이 눈을 뜹니다. 하지...

FREE SOLO

레무리안2019-03-10

새벽에 다큐멘터리를 보았습니다. 마지막에 이런 자막이 떴습니다. "대부분의 프리 솔로 등반가들은 죽는다.' '프리 솔로'라는 어감에서 느껴지는 한없는 자유와 절대고독, 다큐멘터리는 인간의 존재성에 대해 묻고 또 묻게 합니다. 다큐멘터리는 알렉스 호놀드가 900m의 거벽 엘캐피탄을 로프 없이 단독 등정하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주인공에게서 느껴지는 완전무구한 순수함도 또한 프리솔로가 만들어내는 무심의 결과라는 생각이 듭니다. 지난해 가을 미국 극장가를 강타했던 이 영화가 산악 영화로는 세 번째로 ...

동무여, 봄의 서곡을 아뢰라

레무리안2019-02-22

동무여, 봄의 서곡을 아뢰라 심금(心琴)엔 먼지 앉고 줄은 낡았으나마 그 줄이 가닥가닥 끊어지도록 새 봄의 해조(諧調)를 뜯으라! 그대의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픈 줄이야 말 아니한들 어느 누가 모르랴 -심훈, '봄의 서곡' 일부 ​

지관

레무리안2019-02-20

오늘 아침, 기이한 내적 압력에 밀려 '지관(止觀)'을 붓으로 썼습니다. 몇 해 전, 아마도 오륙년쯤 된 듯한데 그때는 번쩍이는 돈오의 힘에 이끌려 '불이(不二)'를 쓰고 큰대자로 누웠었는데 지난 몇 해 동안의 내적 압력이 다시 임계점에 달해 드디어 오늘 아침 지관의 문을 열게 한 듯합니다. 지난 몇 년 나를 지탱케 한 원력은 보왕삼매론의 지침을 배경 삼은 것일 수 있습니다. 수행하는 데 마가 없기를 바라지 마라 수행하는 데 마가 없으면 서원이 굳건해지지 못하나니 그래서 성현이 말씀하시되 모든 마군으로서 ...

교감

레무리안2019-02-15

아침마다 거실 베란다 창 앞의 전나무에 참새들이 떼지어 찾아옵니다. 베란다 문을 열 때까지 목화덩어리처럼 나무에 앉아 있다가 컵에 쌀을 담아 투척하면 일제히 내려앉아 신나게 아침을 먹습니다. 참새들은 너무 민감해서 날아오르고 내려앉기를 수도 없이 반복하며 낱알을 쪼아먹습니다. 뿐만 아니라 탐욕을 부리지 않고 필요한 만큼만 먹고 날아가 다른 참새들에 대한 배려가 생리적으로 작용하는 걸 확인하곤 합니다. 작업실 창 앞에는 붉은 열매가 가득 맺힌 산수유나무가 있어 이곳에는 직박구리들이 많이 날아와 열매를 쪼아먹습...

밤에 받은 편지

레무리안2019-02-04

작가들과의 모임을 마치고 늦은 밤에 귀가했을 때 식탁 위에 국제우편이 놓여 있었습니다. 배낭을 메고 먼 타국을 돌고 있는 후배 소설가가 보내온, 참으로 오랜만에 받아보는 손편지였습니다. 그것을 읽고 울컥, 나도 모르게 눈두덩이 욱신거려 (깊은 밤의 정서 때문인지, 술기운 때문인지) 이런, 이런, 하는 탄식을 나도 모르게 연해 터뜨렸습니다. 홀로 외롭고 긴 여정을 견딜 때 밀려오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지나간 시간성 속에서 우러나오는 진실의 형상들, 그런 것으로 그는 악필을 무릅쓰고 긴 편지를 쓰고 있었습니다....

1월

레무리안2019-01-16

함백산 등정을 하러 갔다가 눈이 전혀 내리지 않은 백두대간의 살풍경에 진저리를 치고 차를 돌려 삼척으로 내려가 바다를 보고 왔습니다. 아주 오랜만에 들른 추암(湫岩), 전망대로 올라가자마자 예사롭지 않은 장면이 단박 시선을 사로잡았습니다. 촛대바위에 의연하게 서서 늦은 오후의 양광을 받고 있는 갈매기 한 마리, 그것에 기막힌 상징성이 숨어 있는 것 같아 장망원 렌즈를 장착하고 여러 장의 사진을 찍었습니다. 오직 저 갈매기 한 마리와 만나기 위해 태백-함백산-삼척을 거쳐 촛대바위 앞에 선 듯한 기이한 느낌! 저 갈매기...

長春에 대하여

레무리안2019-01-16

이 한 장의 흑백사진에 많은 사연이 담겨 있습니다. 2017년 10월, 중국 길림성 장춘시를 방문했을 때 찍은 것인데 시간과 공간, 그리고 제한적인 움직임들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일들을 경험하였습니다. '장춘'이라는 지명은 한자로 '長春'으로 표기하여 '긴 봄'이라는 의미가 되지만 실제로는 겨울이 너무 길고 봄이 너무 짧아 붙여진 반어적 표현이라고 합니다. 긴 겨울을 견디며 긴 봄을 꿈꾸는 마음, 한 장의 사진을 보며 동토(凍土)와 해토(解土)의 의미를 생각해 봅니다.

마음의 일출

레무리안2019-01-01

새해가 밝았다고 사람들은 인식합니다. 시간이 흐른다고 사람들은 인식합니다. 그래서 공간 이동을 하여 곳곳으로 일출을 보러 갑니다. 모든 것이 아무런 의심없이 습관적으로 이루어지는 일들입니다. 일출 장면은 장엄하지만 그것이 세상 도처에서 목격되는 것처럼 실재적인 것일까요? 외부세계로 인식되는 모든 사건이 실제로는 우리 마음에서 일어나는 심상(心象)이라는 뇌과학적 견해는 낯설고 생경하지만 그것은 이미 4세기경 불가(佛家)에서 창출한 유식사상(唯識思想)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와 맥락이 닿아 있습니다...

낙조

레무리안2018-12-31

12월 중순, 한 해를 정리하는 의미로 서해 낙조를 보러 갔습니다. 을왕리해수욕장 끄트머리에 있는 방파제로 가면 언제나 해가 지는 풍경을 볼 수 있어 오랜만에 그곳으로 갔습니다. 해가 지는 풍경, 해가 진 뒤의 풍경이 선명한 대조를 이루어 생사의 대조처럼 서늘한 기분을 느끼게 했습니다. 노을은 언제나 가볍게 보이지 않고 인생처럼 쓸 데 없이 무겁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떠오른 한 편의 시가 있었습니다. 너무 무거운 노을 김명인 오늘의 배달은 끝났다 방죽 위에 자전거를 세워놓고 저무는 하늘을 보면 그대를 봉함한 반달 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