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우 고간

일기예보 적중률 빵점의 행운

레무리안2024-07-12

화요일에 확인한 수요일 일기예보는 오전 오후 비 올 확률 80% 이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수요일 정오 무렵 볼일을 보기 위해 집을 나섰을 때 날씨는 그 어느 때보다 청명하고 쾌청했습니다. 짙푸른 하늘에는 커플운까지 떠서 마음을 설레게 하고 공원을 지날 무렵에는 하늘이 온통 구름 캔버스를 방불케 했습니다. 세상이 훨씬 더 크고 밝게 보여 이를 데 없이 좋았는데 석양 무렵에는 놀빛에 물든 커플운이 다시 시선을 사로잡아 이것이 무엇이냐, 오늘 구름 커플들 데이트하는 날인가, 혼자서 중얼거리며 휴대폰 카메라로 커플운을 채집...

대관령-오대산-월정사-전나무숲길

레무리안2024-07-01

강연 일정이 잡혀 이박삼일 동안 대관령에 머물다 왔습니다. 코로나 이후 처음 가는 발길이라 설렘이 컸고 강제 휴가를 받은 기분이 들어 마음이 더욱 가벼웠습니다. 대관령 일대를 누비고, 오랜만에 황태회관에서 해장국도 먹고 오대산으로 내달려 월정사 전나무 숲길을 맨발로 걷는 여유도 누렸습니다. 7월 첫쨋날 새벽 6시 30분경, 쏟아지는 장맛비를 뚫고 차량 없는 일요일 새벽의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기분도 일품이었습니다. 이번 여름에는 이루어내야 할 큰 작업들이 많아서 내일부터는 힐링 에너지를 마음껏 발산하며 작업에 몰입...

필동 좌담 혹은 잡담

레무리안2024-06-26

오랜만에 차이박 3인이 필동에서 만났습니다. 저녁식사를 하고 나오자 남산 방면으로 석양에 물든 구름이 떠 있고 주변에는 정겨운 불빛이 눈을 뜨고 있었습니다. 바람이 선선해 야외석에 앉아 맥주를 마시다보니 우리가 앉은 자리가 류성룡 선생의 생가터 근처라는 걸 알게 되고 그 인근에 이순신, 권율 같은 분들의 집도 있었다 하니 갑자기 좌중의 분위기가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시대로 돌아가 말하나마나 한 역사적 견해로 시간과 술을 축내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역사에서 우리가 도출하는 건 사실 그 자체일 수가 없고 복잡다단한 ...

유월 첫날, 문득 오드리

레무리안2024-06-03

토요일 자정이 지난 시각, 강의준비를 끝내고 문득 고개를 돌렸을 때 신기하게도 늘 그 자리에 있었음에도 한번도 보지 못한 것 같은 오드리 헵번의 사진이 저의 눈길을 사로잡았습니다. 아주 여러 해 전, 부산 영화의 전당에서 구매한 것 같은데 저것이 저의 문구장 안에 있었다는 사실도 까맣게 잊고 살아왔으니 유월 첫날 자정이 넘은 시각의 조우가 너무 낯설고 처음인 듯해서 충격적이었습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저는 오드리 헵번의 골수팬으로 살아왔는데 이제는 '팬'이라는 말이 면괴스러울 정도로 그녀의 존재는 다른...

특별한 구도

레무리안2024-06-02

어느 순간, 천상과 지상이 하나가 된 듯 느껴지는 구도입니다. 저 구도 속으로 들어가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예리하던 현실감각이 의외로 녹록해져 평화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휴가를 가듯, 시간이 주어질 때 한번씩 저 구도 속으로 걸어들어가 마음을 해체하곤 합니다. 별다른 의도 없이, 단지 평화롭다는 이유만으로 인생에 크나큰 위안이 되는 특별한 구도가 있습니다.

소설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레무리안2024-05-19

오랫동안 마음에 품고 있던 책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시기를 맞춰 나타난 한 분 한 분의 작가들, 의도가 막힘없이 펼쳐지게 한 에너지 흐름, 이제 소임을 다하고 몸살을 앓으며 휴식하는 마무리까지. 내가 하는 일을 내가 하는 일이란 생각을 갖지 않고 가는 동안 의식한 것들과 의식하지 않은 것들이 모여 시간성과 물질성의 창조를 목격하고 때마다 사랑과 창조, 헌신과 봉사를 되새깁니다. 감사합니다._()_ https://www.youtube.com/watch?v=HsBYXFV_rYU

기생특별시 종로구 우동 우세 1-1

레무리안2024-05-16

강의실 가는 길목에 <기생>이라는 묘한 식당이 생겼습니다. 겉으로 보아서는 일본식 우동집 같지만 그 이외 어떤 음식을 파는지 잘 알 수 없습니다. 확실한 것은 술을 파는 기생집은 아니라는 것.ㅎㅎ 여기저기 한지에 써붙인 붓글씨체가 보통 잘 쓰는 정도를 넘어 저는 그곳을 지나칠 때마다 붓글씨를 눈여겨보곤 했습니다. 그런데 3주 전 토요일, 강의실로 가는 길이었는데 제가 딱 <기생> 앞을 지나칠 때 두 명의 중년 여성이 밖으로 나와 잠시 동안 저와 같은 지점을 걷게 되었습니다. 그녀들 중 하나가 이렇게 말했습니...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이유

레무리안2024-05-13

사월과 오월, 꽃다발을 몇 차례 선물로 받게 되어 집안에 화병이 네 개로 늘어났습니다. 예전에는 꽃다발을 받으면 이걸 어쩌나, 그것을 집으로 가져가는 과정이 지레 걱정스러웠는데 요즘은 그런 꽃다발 하나하나가 너무 소중하고 감사하여 술을 마신 상태에서도 고이고이 집으로 모셔가곤 합니다. 뿐만 아니라 집에 도착하면 늦은 밤일지라도 꽃다발을 해체하고 한 줄기 한 줄기 다시 재배열하여 유리병이나 텀블러를 찾아 꽂아줍니다. 사실 제가 사는 집에는 공식적인 꽃병이 하나도 없는데 그것은 모든 생화가 며칠이 지나면 어쩔 수...

Since 1985 레트로 카페 을지다방

레무리안2024-04-26

목요일 오후 1시, 을지로3가 전철역 10번 출구. 인생 도반으로 지내는 시인 형과 점심약속이 있어 당도했는데 출구로 올라가보니 주변 풍경이 1970년대와 흡사해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출구 옆에 다방 간판까지 나붙어 있었는데, 점심식사를 마친 뒤 시인 형이 저 다방에 올라가 차 한잔 하자고 권해서 재미삼아 가보자며 올라간 곳이 2층의 을지다방이었습니다. 아직도 이런 다방이 남아 있다는 게 신기하다는 생각만 했었는데 안으로 들어서니 사방에 BTS 사진이 어른거려 두리번두리번. 그제야 시인 형은 "이곳이 BTS 성지...

April come she will

레무리안2024-04-18

벚꽃이 지기 무섭게 철쭉과 연산홍이 지천에 흐드러져 집중적인 작업을 위해 커피숍을 오가는 동안 아주 여러 번 걸음을 멈추고 꽃들과 교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늘 같은 꽃이 피는 듯하지만 개화의 양상은 해마다 다른데 금년의 봄꽃들은 예년에 비해 유난스레 색이 짙고 함성과 같은 에너지를 발산하는 게 느껴져 고개를 갸웃거리게 합니다. 아파트 단지와 커피숍으로 가는 인도 양옆으로 흐드러진 봄꽃 속에서 이십 대에 나를 사로잡았던 아련한 이미지가 살아나 걸음이 느려졌는데 다행스럽게도 곡명이 자연스럽게 떠올라 참으로...

벚꽃 클라쓰

레무리안2024-04-12

아파트 단지 주변에 벚꽃 길이 다섯 군데나 있어 해마다 이맘때쯤 되면 주변이 놀라울 정도로 환해지고 며칠 지나면 꽃가루가 눈가루처럼 날려 도로를 뒤덮어버립니다. 지난주부터 작업할 것들이 많아져 벚꽃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다가 오늘 해질 무렵, 대부분의 작업을 종료하고 밖으로 나섰는데 산책길에서 차이 나는 벚꽃 클라쓰를 만나 우뚝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고목에 가까운 벚나무 수피에서 저렇게 초롱초롱한 녀석들이 피어나 나도 모르게 휴대폰을 꺼내들게 만들었습니다. 벚꽃 엔딩이 시작되기 전, 석양을 등지고 선 내 그...

봄을 기다리는 자세

레무리안2024-03-24

토요일 밤, 늦은 시각에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 인도를 걷다가 문득 허공을 올려다보았을 때 헐벗은 형상으로 춤을 추는 듯한 플라타너스를 보았습니다. 긴 겨울, 가지치기당한 채 죽음 같은 침묵의 시간을 견디고 이윽고 봄기운이 완연해지자 생기가 되살아나고 있었습니다. 여느 해와 또다른 한살이를 위해 나이테에 기록되는 또다른 살이의 경험을 위해 높은 곳에서 나무는 은밀한 설렘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 사이에서 우주적인 에너지는 언제나 생명에 기여하고 있음을 한 그루의 겨울나무를 ...

책사냥 후감

레무리안2024-03-01

인터넷 서점 장바구니에 담긴 책이 많아져 교보문고에 책사냥을 갔습니다. 목록에 적힌 23권의 책 위치를 검색대에서 찾아 일일이 메모하고 한 권 한 권 찾아다니며 내용을 검토하기 시작했습니다. 교보문고인데 근래 나온 책들 중 5권이 <재고 없음>이었고 나머지 18권 중 대부분은 구매 후보에서 탈락해 최종적으로 구매한 책은 단 두 권이었습니다. 과학분야의 서적들도 양자역학 이후 더이상 진전하지 못한 채 과학자들이 철학과 인문학을 대신하려는 시도가 점점 한계를 보이고 있어 날이 갈수록 낯선 소설의 창조력에 관심이...

지중해보다 더 아름다운 빛

레무리안2024-02-09

코로나 시절부터 미뤄오던 의형제 아우를 만나기 위해 2월 6일 아침 일찍 집을 나서 오전 11시경 부산에 도착했습니다. 너무 오랜만의 해후라 반갑기도 하고 할 얘기도 많아 부산역에서 곧바로 미포로 나가 바다 앞에 앉아 소주잔을 기울였습니다. 25년 동안 의형제로 지내온 좋은 술친구이자 아우인 그와 함께 1박 2일 동안 사람 힐링, 풍경 힐링을 하고 돌아오니 오랫동안 막혀 있던 내면의 환풍구가 모두 열린 것 같아 시원합니다. 다음부터는 약속 없이 어느날 오전 갑자기, 어느날 오후 갑자기 서프라이즈 식으로 부산으로 내려가 ...

서순라길, 입춘 하루 전

레무리안2024-02-04

토요일, 입춘 하루 전 날씨가 봄날 같아서 서순라길로 접어들어 천천히 걸었습니다. 고궁 담 너머의 오래된 나무들에 새순이 돋기에는 이른 시기이지만 대기에는 이미 삼삼한 봄기운이 스며 있었습니다. 완연한 봄이 오기까지 몇 차례의 추위가 더 찾아오겠지만 그런 와중에도 땅속과 수목의 줄기 안에서는 봄기운이 움트고 그것들이 머잖아 봄의 전령사가 되어 나타날 것입니다. 마지막에 아브와에 들러 루이보스차를 테이크아웃하고 창조의 기운이 왕동하는 뇌트워크의 세계로 접어들었습니다. 창조와 사랑, 봄을 부르는 내밀한 명령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