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자 (麥家) / 글항아리
『암호해독자』는 전기의 형식을 띤 소설이다. 실존 인물의 생애를 객관적으로 서술했다는 ‘착각’을 주기 위해 작품 내에 전기 작가를 화자로 배치하고 실제 역사적 사건과 실존 인물들을 등장시키는 한편, 맨 마지막에는 주인공 룽진전의 유품인 수첩의 내용까지 부록으로 첨부하는 기교를 부렸다. 하지만 이런 장치들의 기능을 제외하고라도 이 작품은 작가 마이자가 실제로 특수기관에서 근무하면서 룽진전 같은 불우한 천재들을 가까이서 관찰한 경험이 불어넣어져 있기에 상당한 사실성을 띠고 있다.
룽진전은 1950년대에 중국 수학계의 젊은 총아로서 중국을 인공두뇌 분야에서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릴 것이라는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그런데 특수기관 701의 암호해독가로 발탁되면서 그의 인생은 송두리째 바뀌고 만다. 우선 비밀보안요원의 특성상 철저히 세상의 음지에 파묻히면서 가족과의 인연마저 끊어야 했으며 인류의 복지를 지향하는 과학자의 소임을 버리고서 정반대로 “과학과 문명에 반하고” “인류를 더 간교하고 사악하게 만드는” 암호 관련 업무에 매달려야 했다.
룽진전은 운명에 순응한다. 고아였던 그를 키워준 양부모도, 그의 반려자인 자이도 그것을 당연시했다. 저항하고 슬퍼하기는커녕 일말의 주저도 내비치지 않는다. 맨 처음, 그를 데려가려고 대학캠퍼스로 들이닥친 701의 간부와 면담을 마친 뒤, 그는 양부이자 스승인 룽샤오라이에게 “선생님, 저는 가지 말아야 할 곳에 가게 될 것 같아요”라는 한 마디만 남기고 집을 떠난다. 이에 대해 룽샤오라이는 “나라를 위해 가는 것이니 기쁘게 가려무나”라고 말했다. 의붓누나인 룽인이도 그 후 십 년이나 동생을 만나지 못했지만 “가끔씩 나는, 어떤 비밀을 자기 가족에게도 수십 년, 아니 한평생을 숨겨야 한다는 것은 불공평한 일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을 시에 국가가 존재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면, 적어도 그럴 위험이 있다고 한다면 불공평해도 어쩔 수가 없겠죠”라고 체념하듯 말한다.
당시 중국은 지금처럼 국가사회주의 체제였으며 더군다나 냉전의 한복판에서 적국 X국(소련으로 추정되지만 검열로 인해 작가가 이니셜 처리를 한 것으로 보인다)과 언제 전쟁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여기에 문화대혁명이라는 이념 과잉의 시대가 닥친 데다 무엇보다도 공산당이 제국주의의 위협과 봉건주의의 늪에서 인민을 구한 구원의 상징으로 중국인들의 현실과 정신에서 여전히 군림하고 있었다. 그래서 룽진전은 수첩에서 스스로를 ‘잘못된 길로 들어선 한 남자’로 규정하고 “네가 창조하는 것은 결코 파괴하는 것보다 많지 않다.”라고 자신의 암호해독 업무의 가치를 회의하면서도 묵묵히 15년간이나 국가의 지시에 헌신한 것이다.
이것은 정신적 살해다. 어떤 명분과 현실 조건의 불가항력을 이유로 들이대더라도 마찬가지다. 주류 이데올로기에 의한 이런 애국주의의 살해 아닌 살해는 1949년 사회주의 인민공화국 수립 후 현재까지 정도와 범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수많은 중국인들에게, 특히 우수한 지적 능력과 순수한 개인적 지향을 가진 지식인들에게 더 가혹한 형태로 자행되어져 왔다. 그리고 그 살해의 비극성은 정작 피살자인 룽진전보다, 룽진전이 X국의 고급 암호인 블랙코드의 해독에만 매달리는 통에 철저히 소외되다가 끝내 그의 정신적 파멸을 지켜봐야 했던 아내 자이의 마지막 한마디에서 발견된다. 그녀는 이 소설의 일인칭 화자인 전기 작가에게 룽진전을 사랑했느냐는 질문을 받고 “나는 내 조국을 사랑하듯 그를 사랑했어요”라고 답한다. 그리고 룽진전과 결혼한 것을 후회하지 않느냐는 질문에는 한술 더 떠 “내가 사랑한 것은 내 조국이에요. 당신 같으면 후회했다고 말할 수 있나요?”라고 소리친다. 국가를 사랑하듯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국가에 대한 사랑이 어느 정도로 내면화되면 한 사람에 대한 사랑과 등치될 수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때는 어떤 시대였기에 그녀는 “당신 같으면 (그런 사랑을) 후회했다고 말할 수 있나요?”라고 그 사랑의 보편성을 확신할 수 있었고 또 일인칭 화자는 “나는 순간 솟구쳐 오른 그녀의 눈물을 보면서 갑자기 코가 시큰해지며 울고 싶어졌다”라고 동감했던 것일까?
『암호해독자』는 2014년에 펭귄 클래식 시리즈에 선정되어 세계 35개국에서 출간되었다. “마이자의 글쓰기 제재는 세계적 보편성이 있습니다”라는 담당 편집자의 말처럼 ‘암호’와 ‘첩보전’이라는 제재가 서양인들의 기호에 맞는다는 뜻일 것이다. 『암호해독자』가 장르소설적 소재와 기법을 이용해 재미와 문학성을 겸비한 점은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사실 마이자의 작품세계가 가진 이 공통적 특징 때문에 마오둔문학상 심사위원회도 그의 『암산』을 수상작으로 정하는 과정에서 진통을 겪어야 했다. 중국에서 가장 정통적인 권위를 자랑하는 이 문학상은 『암산』이 전통적인 의미의 문학작품이 아니라는 점에서 선정을 주저했다. 이 작품은 전기적인 인물의 특수한 이야기를 기술한, 대중소설의 변종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들도 결국 이런 ‘변화’를 인정하고 마오둔문학상의 수상 기준을 근본적으로 변경해야만 했다. 그만큼 마이자의 문학세계는 문학의 교훈성과 오락성의 대립을 넘어설 정도로 매력적이었던 것이다. 예민한 독자들이라면 이 작품의 흥미진진한 서사 사이사이에 접혀 있는 주름을 펴고 룽진전을 비롯한 ‘정신적 피살자’들의 내적 풍경을 들여다보려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