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storycosmos.com/genre/01_view.php?no=85&sort=default&gs=1&qa=&aa=&quantity=&author_type=&page=1
‘융프라우’하고 발음하면 지상에 있는 내가 공중으로 떠오르는 게 느껴진다. ‘융프라우’라는 단어를 처음 발음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것은 변하지 않는다. 신기한 일은 ‘지금 이곳의 나’가 떠오르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내가 ‘융프라우’하고 발음하면 ‘나’라고 믿어지는 무엇인가가 청평호의 일정한 수면 위―떠오르는 공간이 매번 동일하다―로 떠올라 비탈진 산 쪽을 응시하는 게 또렷하게 느껴진다. 아주 높이 떠오르는 것도 아니다. 수면으로부터 1미터 정도 높이에 떠 웬일인지 시종일관 산 쪽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뿐 더 이상 다른 건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소설을 쓰는 동안 ‘나’라고 믿어지는 무엇인가가 내내 청평호의 일정한 수면 위에 떠 있었다. 소설을 쓰는 내내, 특히 소설이 막힐 때마다 나는 주문처럼 ‘융프라우’라는 발음을 수도 없이 되풀이했다. ‘융프라우’라는 발음 속에서는 가장 높은 곳과 가장 낮은 곳을 연결하는 알 수 없는 융화력이 느껴졌다. 하지만 소설을 다 쓰고 난 뒤에 나는 비로소 알았다. 내가 ‘융프라우’라는 발음을 통해 소설적 영감을 얻고, 소설을 쓰고, 알 수 없는 융화력을 느낀 게 아니라 그 반대라는 것. 다시 말해 내가 ‘융프라우’를 발음한 게 아니라 융프라우가 나를 발음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 것이었다. 융프라우가 나를 발음하는 소리가 ‘융프라우’라면 내가 곧 융프라우라는 말이고 그것의 진동음이 ‘나’라고 믿어지는 무엇인가를 청평호의 일정한 수면 위로 떠오르게 했다는 얘기가 되는 셈이다.
내가 왜 융프라우인가. 나로서는 알 도리가 없다. 내가 ‘융프라우’하고 발음할 때마다 작동하기 시작한 일련의 현상들에 대해서도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융프라우가 나를 발음하여 내가 ‘융프라우’하고 발성하는 동안 나는 나를 벗어나 ‘나’라고 믿어지는 무엇인가가 지금과 다른 공간에 떠 있는 걸 자각했을 뿐이다. 이 일련의 현상들에 대해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발설한 적이 없다. 나에게는 너무 뚜렷한 현상이지만 타인들에게는 설명할 방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나에게는 이런 문제가 남았다. ‘융프라우’라고 발음하는 존재가 나인가, ‘융프라우’라고 발음하게 만드는 존재가 나인가, 아니면 ‘융프라우’라고 발음할 때마다 청평호의 수면 위로 떠오르는 존재가 나인가. 솔직히 말하자면 그 중의 어느 것도 나라고 말하기 어렵다. 나라고 말할 수 있는 실체는 어디에도 없고, 나라고 말하기 어려운 바로 그것이 나라고 믿어지는 가짜 나라는 것―그것이 ‘융프라우’라는 발음 속에서 내가 깨달은 마지막 나의 모습이다. 물론 지금은 소설이 끝났으니 ‘융프라우’라고 발음하지도 않고, 누군가 나에게 ‘융프라우’라는 발음을 하게 만들지도 않으니 ‘융프라우’라는 발음 속에서 내가 찾아낸 다양한 나의 모습은 모두 잠시 잠깐 스쳐간 망상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