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여 년 전쯤, 어떤 잡지로부터 <나의 여행 앨범> 청탁을 받고
사진 한 장과 원고를 첨부해 보냈습니다.
본인이 실린 기사나 잡지를 한 점도 모아두지 않고 모두 버리는 성정이고
심지어 책을 출간하고 나면 그것까지 눈에 안 띄게 모두 처리하는지라
<나의 여행 앨범>이 실린 잡지도 버리려다가 문득
그 사진을 중국에서 찍어준 중앙일보 손민호 기자와 그 원고를 쓰던 당시의 심정이 태클을 걸어
그 페이지만 찢어 작업실 벽에 붙여 두고 지냈습니다.
원고에 기록한 나의 심정을 잊지 않고 살겠다는 심정이었을 터인데
십년 세월이 넘다보니 벽에 붙어 있던 종이가 누렇게 빛이 바래고 비틀어져
오늘 아침 문득 그 내용을 다시 한 번 읽어보았습니다.
별 감흥이 없으면 뜯어버릴 심산이었는데, 내용을 읽은 뒤
아무 망설임 없이 그것을 휴대폰으로 찍어 이곳에 옮겨두기로 했습니다.
작가생활 20년차 되었을 무렵의 글이 30년차가 된 현재도 유효하다는 판단,
그것은 '헛된 망상과 부질없는 말의 성찬'에 대한 경계심이었습니다.
내가 작가로서 루쉰을 좋아하는 건 일체의 망상을 걷어낸
그의 냉철한 현실 인식 때문이다. 문학에서 아무런 자성도 없이 통용되는
모든 허위와 언어적 공전(空轉)을 거부하고
그는 현실에 바탕을 둔 강인한 인식을 중시했다.
나의 문학 경륜이 20년을 넘어서면서
바로 그 점이 인간을 다루는 소설에서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절감한 때문일 수도 있을 터이다. 문학뿐 아니라 우리 인생도
헛된 망상과 부질없는 말의 성찬을 걷어내야
비로소 온전한 삶의 결실에 이르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