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도 김종삼 시집 『북치는 소년』의 초판을 소장하고 있다. 1979년 5월에 발간된 것이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종이는 누렇게 바래고 시인은 세상을 떠났다. 시집이 발간되던 1979년에 나는 대학 3학년이었다. 대학시절 시를 쓰던 나에게 김종삼 시집의 발견은 참으로 크나큰 위안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왜 위안이었는지를 나는 지금도 설명하지 못한다. ‘내용 없는 아름다움’이 있는 것처럼 ‘이유 없는 이끌림’도 있는 것이다. 나는 그의 시집을 항상 가방에 넣고 다녔고, 시간이 날 때마다 시집을 꺼내 읽으며 연필로 메모를 하곤 했다. 지금도 시집을 펼치면 당시의 메모가 나타나 정겨운 느낌이 되살아나곤 한다.
시인 김종삼은 1984년에 세상을 떠났다. 안타깝게도 나는 생전에 그의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이리저리 떠도는 풍문을 통해 그가 시와 술과 고전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세상을 일관한 시인이었다는 사실만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밤 열두 시 이전에 듣는 것은 음악이 아니다’라는 그의 말을 전해들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나를 사로잡은 것은 독특한 그의 시였다.
나는 그의 시를 간단히 요약해 ‘내용 없는 아름다움’이라고 말한다. 세상의 대부분 시들이 의미를 구축하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전달하려 하지만 그의 시는 오히려 의미를 무화시키고 여백을 극대화함으로써 되풀이해 읽다 보면 묘한 명상 효과를 불러올 때가 많다. 그런 시들이 수다하지만 그중에서도 내가 특히 좋아했던 시가 바로 「스와니江이랑 요단江이랑」이었다.
그해엔 눈이 많이 나리었다. 나이 어린
소년은 초가집에서 살고 있었다.
스와니江이랑 요단江이랑 어디메 있다는
이야길 들은 적이 있었다.
눈이 많이 나려 쌓이었다.
바람이 일면 심심하여지면 먼 고장만을
생각하게 되었던 눈더미 눈더미 앞으로
한 사람이 그림처럼 앞질러 갔다.
「스와니江이랑 요단江이랑」에는 나이 어린 소년과 ‘한 사람’으로 지칭되는 존재가 내재해 있다. 소년을 에워싼 것은 눈 내리는 세상과 눈더미뿐이다. 하지만 소년은 이미 스와니강이랑 요단강에 대해 들어버린 조숙한 정신의 소유자이다. 소년을 에워싼 백색 고독의 세상…… 하지만 시는 소년을 에워싼 풍경만으로 끝나지 않고 풍경의 세계를 그림처럼 앞질러간 한 존재를 보여준다. 아무런 설명도 없고 아무런 인과도 없다. 성인이 되고 세상의 공허를 깨친 누군가 그림자처럼 시의 공간을 스쳐 지나가는 것이다.
그는 누구일까.
「스와니江이랑 요단江이랑」을 읽으며 나는 오랫동안 ‘눈더미 눈더미 앞으로 / 한 사람이 그림처럼 앞질러갔다’라는 표현에 사로잡혀 있었다. 시집을 늘 가지고 다니던 당시의 연필 메모에는 그것이 ‘죽음에 대한 관념의 풍경화’라고 기록돼 있었다. 아마도 요단강과의 연관성을 의식하며 남긴 메모일 터였다. 하지만 나는 그의 또 다른 시 「스와니江」을 읽으며 눈더미 눈더미 앞으로 그림처럼 앞질러 간 존재가 스티븐 포스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당시에 했었다. 너무 유사한 풍경이 발견된 때문이었다.
스와니江가엔 바람이 불고 있었다
스티븐 포스타의 허리춤에는 먹다남은
술병이 매달리어 있었다
날이 어두워지자
그는 앞서가고 있었다
영원한 江가 스와니
그리운
스티븐
세월이 흐른 뒤, 나는 그것이 스티븐 포스타인 동시에 김종삼이라는 걸 알았다. 뿐만 아니라 나이고 너이고 우리 모두라는 걸 알았다. 자기 인생의 흐름에 이끌려 스와니강으로 요단강으로 그림처럼 앞질러가는 존재들…… 이제는 시인 김종삼이 왜 자신의 시에서 의미를 구축하지 않았는지도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이 구축하려고 애쓰는 현상계의 모든 의미가 궁극적인 본질에 가 닿을 수 없다는 뚜렷한 한계를 감지한 때문이다. 아무리 기를 쓰며 구축하고, 아무리 기를 쓰며 강조해도 우리가 살다가는 세상에 대해 우리는 완성된 문장을 남기지 못한다. 그것이 문학의 존재 이유라는 걸 이제는 나도 알 것 같다. 문학은 쓰는 게 아니라 그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는 것 중 가장 아름다운 것, 그것이 바로 ‘내용 없는 아름다움’이 아니겠는가.
21세기, 이제는 누구도 김종삼 시인을 말하지 않는다.
이제는 누구도 김종삼 시인의 시를 말하지 않는다.
영원한 江가 스와니
그리운
김종삼